마늘
- 김형영 -
작년 11월에 필리핀으로 여행을 갔다.
놀기 위해서 간 것인데, 나날이 내 몸은 쇠해갔다.
천국 같은 그 곳에 천국 같지 못한 내가 적응을 못해서인가?
'설마...'
연예인마냥 빼곡한 스케줄에, 게으른 내 몸이 반발심을 일으키는 것일까?
'놀려고 간 것이잖아.'
열대 기후의 이 나라에 온대기후인 내 몸에 알레르기 반응이 생기는 걸까?
'겨울보다 낫잖아.'
첫날에 싱싱했던 내가 밤마다 말린 시래기 되어서 돌아오는 이유는 뭘까?
바로, 음식 때문이다.
더운 나라라서 그런지, 아니면 관광지 음식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내 입에 들어오는 것은 기름에 튀긴 음식 위주였다. 아침엔 호텔 조식으로 볶음밥, 볶은 고기, 볶은 채소, 스파게티... 점심엔 외부 특식으로 스테이크, 해산물 바비큐... 저녁엔 식당에서 바비큐 뷔페, 호텔 석식으로 볶음 세트 그 녀석들... 내가 과연 중국에 온 것인가? 그나마 내 입에 기름기를 잠시 잊게 해주는 것은 천연 망고주스였다. 해외가면 고추장을 통으로 들고 갔다는 이모의 이야기에 피식 웃으면서 겨우 며칠인데 그걸 못참아요 하면서 한국인은 너무 입맛이 까다롭다고 자조했던 내 입술을 몇 대 때리고 싶었다. 그렇다. 나는 고추장, 간장, 맨 밥이 너무 먹고 싶었다.
그런 나에게 유일하게 기력을 선사한 음식이 하나 있었다. 볶은 음식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맛을 살포시 느끼게 해준 음식이었다. 밥공기에 눌러 담아서 엎어져 나온 듯한, 윤기 나는 밥알 사이로 갈색이 살짝 살짝 도는 그 음식은 마늘밥이다.
남들은 어떻게 먹었을지 몰라도 나는 감격에 겨운 것을 겨우 참으며 마음속으로 '완전 행복해'를 마구 외치며 먹었었다.
고기를 먹을때를 제외하고는 거들떠도 안 본 마늘이었는데, 마늘짱아찌를 한 번 먹어보라면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싫다고 한 나였는데, 그날 마늘은 고추장, 간장, 맨 밥보다 더 사랑스러워 보였다.
요리법도 간단했다.
간 마늘을 기름에 노릿노릿하게 볶은 다음에 식은 밥을 넣어주고 재빨리 볶으면 그만이었다.
매운 맛은 사라지고 특유의 향기만 밥에 가득 남아있을 뿐이다.
밥 한 공기 뚝딱 해치운 나는 다음 스케줄을 아주 훌륭하게 해낼 수 있었다.
어디서 그런 기력이 났는지 남들보다 서너배는 더 헤엄을 치며 돌아다녔다.
그리고 한국에 가면 꼭 마늘밥을 해 먹겠다는 다짐으로 시간을 보냈었다.
한국에 와서 몇주를 바쁘게 시간을 보내다 겨우 마늘밥을 해 먹게 되었다. 요리를 다 한 다음에 마음을 진정시키며 한 입 베어 무는데, 어? 이 질퍽한 감은 뭐지? 맵기도 하고. 아! 쌀이 틀려서 그런가보다. 아니면 기름에 덜 볶았나? 아닌가? 그 맛있던 마늘밥이 왜 도로 마늘*이 되어 버렸지?
*도로묵:이 말의 유래는 조선의 임금이었던 선조가 임진왜란때 피난가시면서 먹을 것이 궁하자 한 백성이 '묵'이라는 물고기를 바쳤습니다. 선조 임금이 먹어보고는 너무 맛이 좋아서 '은어(銀魚)' 라는 이름을 하사했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 궁궐에 돌아온 선조임금은 문득 '은어'가 생각나서 다시 먹었더니 맛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조 임금은 "도로 묵이라고 하라." 고 말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