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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을 이렇게 건넜어요by 펜끝 이천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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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엄마가 살고 있는 곳은 함안군. 경남 창녕군과 함안군을 낙동강이 가른다. 시외버스 터미널은 창녕군 남지읍에 위치해 집에서 도시로 나가는 고속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낙동강을 건너야 한다.

1976년 대구에서 전학을 올 때 처음 나룻배를 타고 낙동강을 건넜다. 요금이 30원이었나? 가물가물하다. 그즈음 ‘낙동강 처녀 뱃사공’ 노래가 유행하기도 했다. 낙동강 가장 깊은 곳, 절벽 아래 나루터가 있었다. 깊은 물을 가로지르는 작은 배를 타고 건널 때면 ‘혹 뒤집어지지 않을까?’ 싶어 몸이 움찔하곤 했다. 겨울이 되면 강물이 얼었고, 수십 센티미터 얼음을 깨고 배가 다녀야 했다. 가끔 마지막 배 시간엔 얼음 위로 뱃사공을 따라 사람들은 걸어갔다. 중간쯤 가다 얼음 갈라지는 찌지직 소리가 들리면 심장이 멈추는 듯. 오도 가도 못하며 무서워했다. 10대 아이는 뱃사공에게 항의도 하지 못하고 온몸을 떨면서 얼음 위로 살살 걸어갔다. “낙동강을 걸어서 건너갔다고?” 아찔하다. 요즘이면 배 주인 당장 구속감이지만 그땐 그랬다.

나라 살림이 좋아지면서 90년대에 들어서 대교가 세워지고 아버지에게 자동차가 생겼다. 전화하면 딸아이를 마중 나왔다. 한 10년은 아버지 차로 낙동강을 건너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끔 택시를 탔다. 차로 5분, 숨을 몇 번 쉬면 도착할 거리이지만 군과 군을 넘나들기에 택시요금은 상당히 비싼 편이다. 언제부터인가 70대 엄마가 오토바이를 타고 와서 나를 마중했다. 그녀 나이 80이 될 때까지 쭉. 어느 날 “이제 짐만 실어라!” “왜요?” “가다가 구르면 큰일 난다.” 뒷말은 안 했지만 여러 번 굴렀던 거다. 그때부터 짐만 실어 보내고 나는 걸어서 낙동강을 건넜다. 강바람을 맞으며 1km 다리를 걷노라니 수많은 옛적 일들이 떠올랐다. 장마철 홍수가 나면 별별 물건들이 떠내려가던 무서운 강물, 강변에 심어둔 수박들이 황토물 속에 통째 떠내려갔고 친구들은 돼지가 물속에 떠내려가는 것도 봤다고 했다.

이제 80 중반 엄마, 백발의 할머니는 오토바이를 운전하지 않는다. 의료기용 전동 휠체어를 몰고 이동한다. 인근 칠서 공단 대형 트럭들이 다니는 도로가 위험천만하지만, 꿋꿋이 전동차 손잡이를 잡고 간다. 운전자들은 알아서 피해 가라고. 택시를 타고 갈 수도 있지만 엄마는 나의 짐을 운반하고 나는 산책 삼아 걷는다. 오리 모양 가로등이 쭉 늘어선 운치 있는 대교에 들어서면 시원한 강바람이 불어온다. 그 옛날의 낙동강 나룻배와 뱃사공은 없고 60만 평의 거대한 유채꽃 단지가 조성된 강둑이다. 4대강 사업으로 만들어진 함안보에 농민들은 살림살이가 좋아졌다고 한다. 그 물속이 어떻게 되는지는 모를 일이다.

강둑을 따라 자전거 도로가 정비되어 사이클링하는 사람들이 줄을 지어간다. 여름이면 강물이 넘쳐 힘겨워하던 모래사장은 이제 캠핑장이 되었다. 자전거를 타고 비포장도로를 다녀오면 머리카락에 뽀얗게 먼지 앉았던 날들은 이제 경험할 수 없다. 잘 포장된 도로와 대교를 따라 걸으며 낙동강을 오가던 40여 년을 회상했다. 그렇게도 벗어나고 싶은 시골 생활이 아련하고 그리울 뿐. 엄마가 하늘나라 가시면 낙동강을 건널 일이 있을까? 마음이 아려온다. 강물에 비치는 석양은 매번 보아도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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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12/19/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