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일본에서는 당시 일본 사회를 충격에 빠뜨렸던, ‘예수의 방주’라는 종교단체와 관련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예수의 방주 사건’은 종교의 자유, 여성의 자율성, 언론의 윤리성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 사건이었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종교 자체보다는 종교를 둘러싼 언론의 보도 행태로 인해 사회 문제로까지 불거진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에서 ‘여성 집단 실종 사건’이라며 처음 보도되었죠. 당연히 전국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경찰 수사와 언론의 취재가 대대적으로 이어졌습니다. 사건의 핵심은, 센고쿠 타케요시라는 인물이 창시한 ‘예수의 방주’라는 기독교 계열의 신흥종교 공동체에 젊은 여성들이 참여하여 집단생활을 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일본 전역에서 20명 가까운 여성들이 실종 신고되었고, 사회는 이를 ‘납치’나 ‘세뇌’로 받아들였습니다.
일본 언론과 사회는 이들의 선택을 존중하기보다는 ‘세뇌된 광신도’, ‘집단 실종’, ‘사이비 종교’라는 자극적인 프레임으로 사건을 규정하였습니다. 오히려 중립적인 관점으로 보도한 선데이 마이니치는 타 언론으로부터 ‘예수의 방주’의 선전매체라는 비난까지 받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경찰 조사 결과, 이 여성들은 납치나 세뇌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로 가족을 떠나 공동체에 참여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여성들은 가족 또는 사회적 억압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영위하고자 했으며, 그 수단으로 종교적 신념과 공동체를 택한 것이었습니다. 센고쿠 타케요시 또한 모든 범죄 혐의에서 불기소 처분되었습니다.
결국 무분별한 언론의 보도 행태는 과도한 비난과 인신공격에 치중했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당시 저명한 문화인류학자 야마구치 마시오는 ‘예수의 방주 사건’에 대한 언론의 보도 행태를 분석하길, 이질적 집단을 괴물화하고 이를 제거하려는 스토리를 담은 기사와 보도로 대중의 불안과 기대를 충족시키는 ‘성스러운 괴물 신화’를 따르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이 사건 이후 언론들은 자신들의 보도 방식에 대해 반성하고 후속 보도를 통해 이런 관행을 개선하려는 시도를 시작했습니다.*
[* 2024년 일본 TBS 테레비에 공개된 ‘예수의 방주 사건’ 다큐멘터리의 연출감독 사이 다이키는 당시 언론 보도가 여성 신도들의 삶과 해석을 제대로 담지 못했다고 돌아보며 ‘단편적 이미지에 집중한 언론의 오류’를 인정했습니다.]
이 사건은, 언론이 단순히 사실을 전달하는 것을 넘어, 사회적 선입견과 감정에 기반한 보도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준 대표적 사례가 되었습니다.
2023년 넷플릭스의 다큐멘터리 <나는 신이다> 또한 사회적으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으나, 신앙을 가진 사람들로서, 특히 섭리에 몸담고 있는 입장에서 볼 때 이 다큐멘터리가 진실을 조명하기보다 상업적 자극성과 편파적 시선을 담고 있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의 방주’ 사건 당시의 언론과 <나는 신이다>라는 다큐멘터리의 형식으로 포장한 보도 방식 간의 유사성, 그리고 미디어가 진실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 살펴보고, 우리가 견지해야 할 태도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1. 사건에 대한 접근 방식
‘예수의 방주’는 다수의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생활한 신앙 공동체였습니다. 그러나 언론은 이 여성들을 ‘집단 실종’, ‘세뇌’, ‘광신도’ 등의 자극적인 표현으로 포장하며 마치 납치되었으니 구출되어야 하는 존재인 양 묘사했습니다. 이들의 자율적인 선택과 종교적 귀의의 배경은 완전히 무시된 채 사회의 ‘문제’인 것처럼 취급되었습니다.
이와 유사하게 넷플릭스의 <나는 신이다>는 기독교복음선교회와 정명석 목사님을 중심으로 특정 사건들을 집중 조명하며, 종교적 신념이나 섭리 공동체의 실제 모습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극단적 사례만을 부각하였습니다.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자들의 증언은 제작진의 입장에서는 중요한 자료로 여겨지겠지만, 그것이 모든 진실을 대표하지는 않으며, 다양한 해석과 맥락 속에서 평가되어야 할 사안입니다.
2. 언론과 미디어: 진실의 수호자인가, 상업의 도구인가
‘예수의 방주’ 사건에서 일본 언론은 철저히 자극적인 방향으로 사건을 몰고 갔습니다. 당시 언론은 여성들이 신앙 공동체를 자발적으로 선택하고 참여했다는 사실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들을 ‘비정상적인 존재’로 설정하여 사회적 불안을 자극하고 시청률과 신문, 잡지 등의 판매 이익을 노렸습니다. 그런 방향으로 흐른 보도는 사실보다 감정과 편견을 유도하는 데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신이다>는 이 점에서 한층 현대적인 포장을 덧씌운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이 프로그램은 ‘다큐멘터리’라는 명칭조차 붙이기 어려운 방송입니다. 다큐멘터리는 ‘실제 상황이나 자연 현상을 사실 그대로 촬영하며, 배우나 세트를 쓰지 않고 극적 요소도 배제한다’고 정의됩니다. 하지만 <나는 신이다>는 배우의 대역 연기, 몽타주 기법, 배경 음악 등을 비상식적으로 활용해 시청자의 과도한 감정적 몰입을 유도했습니다. 그 결과, 다큐멘터리라기보다 일종의 ‘다큐 포르노’로 불릴 만큼 선정적이었습니다. 실제로 일부 언론에서도 이 프로그램을 ‘자극성과 상업성만을 노린 반쪽짜리 기록’이라고 비판한 바 있습니다.* 종교의 구조나 신앙이 지닌 긍정적 기능에 대한 고찰 없이 기독교복음선교회 전체를 하나의 ‘범죄집단’으로 몬 접근은 지나치게 단순화된 시선에 불과했습니다.
[* 실제 어느 주류 언론의 기사 일부입니다. — “넷플릭스가 이 다큐에 투자한 이유는 뻔하다. ‘장사’가 되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가 피해자를 선정적으로 다루고, 대중이 흥분해 린치 태세를 갖추고, 뒤늦게 공권력이 올라타는 ‘악마 사냥’ 오락의 시대가 열렸다. 이게 넷플릭스가 원하는 ‘엔터테인먼트 사업’인가.”]
3. 손쉬운 피해자 중심주의의 이면: 또 다른 낙인의 재생산
우리가 섭리인이라는 점을 최대한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평가하더라도 만약 <나는 신이다>가 다큐멘터리 본연의 정의에 기반한 정말 제대로 된 방송이었다면, 소위 피해자라는 자들의 목소리는 존중받아야 하며, 사회적 보호와 제도적 보완 역시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다큐멘터리가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자들의 존재를 ‘스토리텔링’의 도구로 삼았다는 점입니다. 여기에 사실 확인이 완벽히 되지 않은 주장, 편집된 영상자료, 무절제한 선정적인 장면 활용, 대역배우를 이용한 재현된 장면을 더해 가상의 스토리를 만들어 낸 셈입니다. 실제로는 사회의 일원으로서 건전하고 건강하게 살아가는 대부분의 섭리인들이 이로 인해 조직 범죄의 일원인 것처럼 오해를 받게 만들었습니다. 이 역시 일종의 폭력이며, 신앙 공동체 전체에 낙인을 찍는 또 다른 방식의 사회적 매장입니다.
‘예수의 방주’의 여성들을 ‘세뇌된 피해자’라는 단일 프레임 안에 가둬버린 언론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선택과 실제 삶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당시 언론의 무책임함이라면, 지금 악의를 가진 자들은 <나는 신이다>라는 형태의 고도화된 편집 다큐를 통해 같은 오류를 의도적으로 반복하였으며, 이와 같은 짓을 <나는 생존자다>라는 해괴한 제목으로 또다시 준비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번에는 전작과 달리 섭리를 종교성과 무관한 연쇄살인이나 대형 참사 등 단순 비교조차 불가능한 사건들과 병렬적으로 다루려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무리수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종교성을 강조한 전작의 틀로는 흥행이 어려울 거란 판단하에 어떻게든 섭리 공동체가 ‘공권력과의 유착이나 공권력의 방관 속에서 무시무시한 사건과 참사를 일으킨 범죄조직’인 양 부각시키려는 노골적이고 악의적인 시도일 뿐입니다. 이는 누구라도 그렇게 인식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나라 방송 주체가 소위 글로벌 기반 매체의 횡포를 발판 삼아 한국의 부정적인 면을 ‘정의’라는 가면으로 포장해 전파하는 행태는, 저급한 K-다큐가 그나마 세계에 전해진 한국의 긍정적 사회·문화 이미지를 스스로 훼손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1980년 7월 3일 ‘예수의 방주’ 소속 여신도들이 기자회견을 자청해 언론의 보도가 잘못된 것임을 밝혔으며, 이들의 언급 내용은 모두 사실로 확인되었습니다. 기자들은 이 자리에서도 자극적인 성 관련 질문에 치중하였습니다.
1980년 7월 3일 ‘예수의 방주’ 소속 여신도들이 기자회견을 자청해 언론의 보도가 잘못된 것임을 밝혔으며, 이들의 언급 내용은 모두 사실로 확인되었습니다. 기자들은 이 자리에서도 자극적인 성 관련 질문에 치중하였습니다.
4. 종교 혐오와 일반화의 경계
오늘날 어떤 종교든 그 종교를 선택한 사람들에게 위안과 희망, 삶의 의미를 제공합니다. 그러나 상업성에 집중한 방송 갑질이자 또 다른 폭력으로 전체 섭리 공동체를 ‘사이비’, ‘이단’, 그리고 급기야 ‘범죄집단’으로 싸잡아 매도하려는 것은 깊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마치 ‘예수의 방주’ 사건의 사례에서 신흥 종교에 대한 무조건적인 불신과 낙인으로 그 공동체를 붕괴시킨 것처럼 지금은 ‘종교 혐오’를 더 세련된 언어와 영상으로 표현하고 있을 뿐입니다.
기존 종교와 사회의 부정적 여론과 불공정한 재판으로 설사 정명석 목사님이 부당한 판단을 받더라도 섭리 공동체 전체를 파괴하고,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방식은 근본적인 해결이 아니라 오히려 또 다른 사회적 갈등을 불러일으킬 뿐입니다. 다큐멘터리라면 먼저 구조적 이해를 시도하고 종교적 다양성에 대한 존중을 견지해야 합니다. 그러나 <나는 신이다>는 그런 고민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외형적 충격만을 부각시킨 저급 영상물이 되었습니다.
5. 세상이 진실을 대하는 태도
‘예수의 방주’ 사건과 <나는 신이다>의 공통점은, 결국 진실이란 복잡하고 다층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언론과 대중이 그것을 지나치게 단순화하고 상업적으로 소비해 버렸다는 데 있습니다. 소위 피해자라는 자들도, 신앙인도, 공동체도 모두 복합적인 삶의 궤적 안에 존재하지만 언론은 흑백 논리로 이를 재단하려고만 합니다.
섭리는 분명 많은 구성원들이 신앙을 통해 삶의 방향을 찾고,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기 위해 애쓰는 신앙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나는 신이다>는 그러한 진실을 들여다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를 외면함으로써 또 다른 종류의 사회적 폭력을 만들어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이 사회가 정말 원하던 정의의 모습인지 되묻고 싶습니다.
6. 정의란 무엇인가
‘예수의 방주’ 사건이 일본 사회에 던졌던 질문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과연 세상은 타인의 신앙과 선택, 공동체에 대해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있는가? 언론은 그 책임을 다하고 있는가? 그들은 진실을 볼 준비가 되어 있는가?
넷플릭스의 <나는 신이다>는 분명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고, 그 단맛에 젖은 모리배들은 또 그 꿈을 꾸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반향이 진실에 다가가기 위한 여정이었는지, 아니면 소비적 자극에 불과했는지는 우리는 너무나 잘 압니다.
사기꾼들의 사기 술법이 있습니다. 거짓을 짜 놓고 진실한 것을 조금 갖다 설명합니다. 고로 속습니다. 분별해야 합니다. 사기꾼도 설명을 잘하여서 따라오게 하고서 사기 칩니다. (중략)
인식관을 뒤집는 것은 설명에 달려 있습니다. (중략)
이 시대가 어떻게 속고 가고 있는지를 설명을 잘해 줘야 하는데, 사실 하나님 믿지 않으며 악을 행하는 자들로 인해 알아도 말을 못 합니다. 그러할지라도 저마다 자기 차원을 벗어나고 거듭나서 섭리사에 설명을 자세히 잘하는 증거의 역사가 충만해야 합니다.
— 2025년 8월 10일 주일말씀 <1. 벗어나라. 거듭나라. 2. 설명을 잘하라> 中
우리는 ‘예수의 방주’ 사건 이후 일부 일본 언론들이 그 보도의 선정성과 오류를 자성하며 후속 기사에서 반성의 뜻을 내비쳤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언론과 미디어가 때로는 진실을 외면하고 왜곡할 수 있지만, 그 또한 시간이 흐른 후 진실 앞에 고개를 숙이는 날이 오기도 합니다.
따라서 <나는 신이다>를 만든 제작진과 이를 유포한 매체 역시 언젠가는 자신들이 행한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방송 보도에 대해 반성과 책임을 고백하게 될 날이 올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날이 오면 진실은 더욱 뚜렷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후속작인 <나는 생존자다>와 같은 프로그램이 방영된다 해도, 우리는 섭리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우리는 정명석 목사님의 본질과 섭리의 가치를 잊지 않고, 신앙의 뿌리를 더욱 깊이 내릴 기회로 삼을 것입니다. 외부의 왜곡과 자극적인 이야기 속에서도 중심을 지키고, 신앙의 길을 곧게 걸어가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진실은 시간을 이기고, 믿음은 결국 그 진가를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을 지키는 그 자체가, 곧 진실을 밝히는 촛불이 될 것입니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