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동네

유자송by 파란백조

 

 


남해에 대해 알고 있나요?
얼마 전 모 연예인의 허니문여행지로 유명하기도 했지만, 남해는 역사와 전통이 깊은 곳이다. 남해에는 2010년에 개원한 남해유배문학관이 있다. 이곳에 가면 남해에 유배 온 유배객들의 삶과 그들의 예술혼, 문학작품들을 볼 수 있다.

유배문학은 국문학의 한 장르로 유배 간 사람이 유배가 해제되기를 기다리며 그곳에서 직접 보고 느끼고 당한 사실, 스스로 상상하고 가상해 본 허구를 문예적으로 작품화한 것이다. 조선시대 남해에 유배를 온 사람들은 약 2 백여 명 가량인데, 그들 중 문학작품이 현재 남겨진 사람은 6명 정도이다.

그중 우리에게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로 잘 알려진 서포 김만중, 그의 사위인 이이명, 조광조등과 함께 기묘사화로 유배당한 자암 김구, 광암집, 남천록에 4 백여 편의 한시를 일기형태로 쓴 겸재 박성원, 남해의 풍속을 담은 남해문견록을 기록한 후송 류의양,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의 시조로 잘 알려진 약천 남구만이 있다.

이들의 삶 가운데 유배는 너무나 엄청난 비극이었지만 우리의 고전 작품 가운데 유배를 가지 않았더라면 나오지 않았을 작품들이 있다. 유배를 갔던 본인은 실의와 고난에 찬 나날을 보냈을지라도 우리 문학은 유배형의 덕을 본 것이다.

걸작품은 편안함 가운데 나오는 것이 아니고 비바람 속에서 깍고 닦여 나오는 것인가 보다.
약천 남구만은 숙종 5년에 남인을 탄핵하다 남해로 유배되었다. 그는 남해에 온 후 병이 나 초췌해지고 시도 짓지 않았지만, 성품은 여전히 곧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여러 달이 지난 후 점차 마음이 안정되면서 유자가 햇볕과 바람을 맞으면서 속을 채워가듯이 조용히 절도 들르고 산도 오르면서 선비들과 백성들을 가르치게 된다.

그리고 남해의 명물이 유자인데 유자에 대한 시를 지은 것이 없는 것을 알고 중국의 굴원이 귤송을 지은 마음으로 유자에 대한 시를 지었으니 그 시가 영유시 (詠柚時) 20수이다.
남구만은 유배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유자를 대상으로 시를 지었는데  유자가 남해를 대표할 수 있는 것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며 더불어 유자를 통해서 우리 삶의 바른 이치를 말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연한 살이 가득 차 있고 그윽한 향기를 풍기는 귀한 유자를 부모님께 드리지 못하는 것을 송구해 하며 당시 유자(儒者)가 어떻게 바른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노래하고 있고, 노랗게 익은 유자의 향기로운 껍질이 비단 같아 이것을 보기 위해 천천히 걸어가며 유자의 광채와 향기가 나는 그 덕을 사모하였다. 유자의 색깔은 노란색이므로 오행(五行)으로 볼 때 토(土)에 해당되어 토의 역할처럼 유자가 가운데에서 모든 사물을 조율하면서 상생(相生)할 수 있는 덕을 지녔고 또한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용의 덕을 지킬 수 있는 바름(正)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또 유자는 오래된 무소가죽과 같은 단단한 자질이 있고, 햇수가 오래되어도 변치 않는 협객의 기골을 가지고 있으며, 황금 같은 얼굴과 패옥 같은 살을 지니고 있다고 유자를 노래하였다.

유자는 오랜 시간 비바람을 맞으며, 겨울의 찬 서리를 맞으며, 따가운 햇살에 그을리며 금빛 향기 나는 유자로 변해 간다. 그리고는 자신의 살을 아낌없이 나누어 준다. 그야말로 유자는 성인이 아니고서는 행할 수 없는 일을 한다.

남구만이 한양에서 편하게 정치만 하고 있었더라면 유자는 그냥 한낱 유자에 불과했을 것이다. 절해고도인 남해에 유배 가 있으면서 그는 유자 하나를 보더라도 이전과는 달리 보았을 것이다. 자신속의 아픔과 상처가 있기에, 고독과 외로움이 있기에 유자가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 유자는 황금의 귀한 과일로 자신을 만들 듯이 우리도 어느 곳에 있더라도 비바람을 맞으면서 때로는 햇살을 맞으면서 자신을 향기 풍기는 인생으로 만들어야 하겠다.
 
날씨가 조금씩 추워져 가는 이 때, 이제 유자차를 마시면 남구만의 영유시가 머리에 떠오르고 입에 닿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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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12/8/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