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Cents Column by Director Bong of RGO 24! 'Although I am lacking and my writing is only worth as much as 'three cents...' I share the Sunday messages and interpret them with 'the language of the world.''
신약시대를 이끌었던 사도 바울은 하나님과 예수를 아예 알지 못 하는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선교 활동을 펴는 것보다 하나님을 알고 있으되 그 역사하시는 방법에 대해서 ‘잘 못 된 생각’을 가졌던 유대인들과 ‘잘 못 된 생각’으로 예수를 알고 따르는 영지주의자(Gnosist) 등을 대하는 데 더 많은 힘을 소모했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생각이 온전하지 못 한’ 사람들 때문에 그가 기울인 많은 활동과 노력들이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을 것입니다.
현대를 탈종교화(脫宗敎化)의 시대라고 정의하곤 합니다.
탈종교화의 주요 현상으로 ‘세속화’와 ‘탈제도종교화’를 꼽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속화’는 말 그대로 종교가 세속화 되면서 그 본연의 긍정적인 영향력을 상실 해 가는
것을 말함이고, ‘탈제도종교화’는 종교적 관점에서 엄격하게 다루어졌던 ‘종교적 제도’의
중요성이 약화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오늘 날 종교의 기능과 권위가 약해지면서 ‘사람들’과의 괴리가 심해지는 것은 탈종교화에 대한 ‘종교’의 대비가 미흡함 때문일 수 있습니다.
사실 정명석목사께서는 수 십 년 전부터 이런 시대를 대비한 목회 철학을 보여주셨고 실천 하신 분입니다.
십의십조를 하늘 앞에 드리기까지 했지만 어떤 신도들에는 배고프면 헌금할 돈으로 빵을 사 먹고 교회에 오는 것이 낫다 하셨습니다.
누구보다 성수주일(聖守主日)에 투철한 분이셨지만 신도들의 상황을 들어보시고 어떤 이에게는 주일 직장근무를 하게 하시며, 주일말씀을 따로 챙겨 보게 해 주시곤 했습니다.
‘(젊은이들의 끼와 재능을)개발하라’는 영감을 받으신 후로는 거룩한 예배 단상을 젊은이들의 예술제 무대로 바꾸기까지 하셨습니다.
이를 두고 세간에서는 ‘지극히 세속화 되었고 엄숙한 종교제도를 무시하는 집단’이라 비판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어떤 면에서 ‘세속화 했고, 탈 제도화’ 한 것이 맞아 보입니다.
하지만, 알고보면 탈 종교화 현상에 대한 예지적 조치를 취하면서 새로운 종교의 기능과 형식을 선제적으로 제시한 것이었다 볼 수 있습니다.
정명석 목사님의 ‘세속화’는 하늘 뜻을 세상에 실현하는 과정이었고, ‘탈 제도화’는 합리적 이성에 따르는 새로운 실천 논리를 제시한 과정이었습니다.
아니나다를까 그 결과로 오늘의 기독교 복음 선교회는 참 된 종교의 모습을 가장 순수하게 유지하고 있는 선교단체가 되었습니다.
모든 회원이 엄격하게 술, 담배를 금하고 혼전 순결과 새벽 기도 엄수를 실천하고 있습니다.또한 어느 단체보다 하나님과의 ‘소통’에 대해 목말라고 하고 있으며, 그 뜻을 알고 실천함으로써 하늘을 먼저 사랑하는 일에 인생의 가치를 크게 두고 있습니다.
물론 종교 본연의 모습을 유지하고 확대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중에도 일부 잘 못 된 생각을 갖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늘과 ‘소통’을 한다고 미신적인 행동으로 빠지거나, 자신의 깨달은 바를 ‘하늘의 말씀’이라고 주관적 맹신에 빠질 우려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늘과의 소통을 원하는 자는 일반인들에 비해 두 배 이상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뜻’을 깨달았다면 이를 두고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교회 뿐 아니라 도서관에도 들러 책을 보면서 더 객관적이고 분석적으로 그 뜻을 ‘세속화(긍정적인 의미에서)’하기 위해 노력해야합니다.
이런 노력이 뒷받침 되지 않는다면 마치 스스로 ‘샤먼(Shaman)’과 같은 사람이 되려고 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샤먼은 비이성적 상태에서 초자연적 존재와 접촉하려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분이십니다. 분명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범위를 초월한 존재임은 틀림 없습니다.
그렇다고 합리적 이성을 놓아 버리고 신을 찾으면 더 황당한 지경에 이르게 될 뿐입니다.
합리적 이성도 신이 인간에게 부여하신, 당신을 찾아 오도록 부여한 신으로부터의 선물입니다.
소수라 해도 샤먼화 현상이 시작되면, 기복(祈福)을 위해 용한 무당(巫堂)을 찾아 이리저리 수소문 하고 다니는 것과 같이 ‘말씀에 대한 자기화(현실화 일종의 Incarnation 또는 세속화)’ 노력이 없이 여기저기 ‘좋은 말씀’을 찾아 다니기만 하는 사람들이 동시에 양산 될 우려도 있습니다.
말 그대로 하늘 역사는 샤머니즘이 되어 버릴지 모른다는 말입니다.
또한, 신앙 활동에 있어 특정 시간, 특정 장소만을 강조하는 것은 토테미즘에 빠질 우려가 있습니다. 정명석 목사께서는 성경의 다니엘과 같이 하루에 세 때를 정해 빠지지 않고 기도하고 계십니다.
하루 종일 하늘 일에 파 묻혀 사시니 일에 빠질까 봐, 특별히 시간을 쪼개 따로 나눠 하늘과 대화하고자 하는 최소한의 장치와 제도를 스스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런데 일부 사람들은 ‘특정 시간’, ‘특정 장소’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그 자체가 신앙의 기준이 된 경향을 보입니다. 그리하여 그 시간,장소를 지키는 사람과 그렇지 못 한 사람으로 구분하여 일종의 차별을 하기까지 합니다.
특정 '시각'이라는 기준은 한정 된 지역에 살고 있는 좁은 시각에서나 그 '시각'의 의미가 있지, 지구촌 전체를 놓고 보면(하늘의 관점) 그것이 몇 시든 해당 시각인 곳이 반드시 있습니다.
꼭 ‘교회’라는 장소에서만 기도하는 것을 중시하는 것도 생각이 짧은 경우에 해당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몇 십평 혹은 몇 백평 남짓 콘크리트 건물 안에 깃든 존재(일종의 Totemism)로 착각하면 안 됩니다.
도대체 예루살렘 성전 외에서는 예배 드릴 수 없냐 묻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어디서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록 된 말씀을 잊으면 안 됩니다.
산(山)기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산(살아 있는)기도가 의미가 있는 것이고,
몇 시에 얼마 동안 기도 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얼마나 진정어린 기도를 했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생각은 짧고 작습니다. 생각이 작고 좁을수록 삶도 신앙도 불편하고 피곤하게 됩니다.
정명석 목사님 비유대로 ‘생각이 좁아서 황금마차가 지나 다닐만한 길을 못 내고 있으니, 겨우 발 품 팔아 걸어 다닐 수 밖에 없는 인생’을 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생각의 차원을 높여야 합니다. 신의 입장, 신의 관점에서 생각 할 수 있을 때 위대한 하늘 역사의 터전을 딛고 일어 선 ‘사도’의 모습을 갖게 될 것입니다.
작두에 올라 타 있는 무당의 모습이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