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Cents Column by Director Bong of RGO 24! 'Although I am lacking and my writing is only worth as much as 'three cents...' I share the Sunday messages and interpret them with 'the language of the world.''
굳이 '코로나 19'까지 거론을 않더라도 현대인들에게 있어 '우울감'의 문제는 중차대한 사안입니다.
이 우울감은 자존감의 결여와 긴밀히 연결 되어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못 나고 어리석어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나'
정명석 목사께서도 열혈청년의 때 이런 '못 난' 자신을 두고 극단적 선택까지 고민했었다고 합니다.
못 나고 어리석은 '나',
이를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과연 이런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예전에 성경을 읽을 때 쉽게 이해되지 않았던 대목들이 있습니다.
당연히 목자의 말을 잘 따르는 아흔아홉마리 양이 훨씬 귀할테지만,
선한 목자(성삼위, 주)에는 뺀질 되다가 길까지 잃어 버린 골칫거리 양 한 마리가 더 귀해서 아흔아홉 마리 양을 길 가에 방치 하다 시피하고서도 한 마리 잃은 양을 찾아 떠납니다.
공평하고 정의롭게 따진다면 새벽 6시부터 하루 종일 땡볕에서 주인과 함께 수고한 자들이 단 한 푼이라도 더 받아 가는 것이 '합리적'이겠지만,
포도원의 주인(하나님)은 오후 5시나 되어 그 때부터 겨우 한 시간만 일한 자들에게도 똑 같이 한 데나리온의 일당을 지급함이 옳다고 합니다.
인간들의 시각으로서는 불합리한 듯 보이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 위한 단서 역시 성경은 제시 해 줍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와 평생 함께 한 장남에게는 염소 한 마리도 잡아 주지 않다가 제 받을 유산까지 미리 다 챙겨 가 털털 탕진하고 돌아 온 탕자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 잡기를 아끼지 않습니다.
장남의 입장에서 보면 포도원에서 새벽 6시부터 일한 자들과 같이 아버지의 '뜻'을 이해하고 수용하여 잔치를 벌이기까지 하시는 아버지의 즐거움에 참여하기가 쉽지 않아 보입니다.
열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지만 분명 더 마음이 가는 자녀는 존재합니다.
공부 잘 하고 건강한 자녀는 부모의 자랑거리요 쳐다 볼 때마다 대견한 존재이겠지만, 어딘가 부족하고 병약한 자녀가 있다면 이는 부모의 마음 더 깊은 곳에 내내 머물러 있으면서 더 큰 사랑과 관심을 받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긍휼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포도윈에서 오후 5시나 되어서 일을 시작할 수 있었던 사람은 하루종일 쓰는 사람이 없었던, 분명 '결격사유가' 있는 자 였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포도원 주인마저 써 주지 않으면 당장의 생계를 잇기가 어려웠을 것이라 주인은 이를 긍휼히 여기고 아껴 한 데나리온을 주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흔아홉 마리 양은 길 가에 그냥 두더라도 별 문제가 없었을테지만 길 잃은 양 한 마리는 이리와 늑대에게 해를 당할 것이기에 선한 목자는 그 한 마리를 위해 서슴없이 길을 나섰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탕자의)'아버지'와 같이 못 났고 어리석은 자라 할찌라도 그를 더 사랑으로 감싸 안으시고 귀히 여겨 주신다는 것입니다.
정명석 목사께서도 이 깊은 '사랑'의 세계를 깨닫고서 '내가 하나님 앞에서 가장 귀한 자'임을 시인할 수 있었고,
이 후로 20여년의 세월동안 하나님 모신 신앙의 실천 생활을 통해 정말 명실공히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만한 '말로써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써 말씀을 전하는' 최고 귀한 자로, 거듭났음을 간증하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종교'에 있어 '개인'이 갖는 의미와 비중은 무척 큽니다.
'나'는 '종교'를 통해 위안을 얻고, 또 '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종교'가 필요 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攝理)'는 사뭇 다릅니다.
'나(인간)' 보다 오히려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중합니다.
성경에서 정의하는 아담과 하와의 '타락'은 자기의 좋은 것, 자기의 뜻을 좇아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상태'임을 말해 줍니다.
사람들의 뜻은 자기 좋을대로 혼인하고 먹고 마시며 인생을 즐기는 것이었지만 하나님의 뜻은 높은 산 꼭대기에 생뚱맞게도 방주를 짓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뜻은 대국(大國) 애굽에 '정착'하는 것이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뜻은 막막한 광야로의 '떠남'이었습니다.
언뜻 봐서 '나의 뜻'과 '하나님의 뜻'은 이율배반적인것 처럼 보이고, 납득하기도 수용하기도 어려워 보입니다.
하지만 이를 깊이 따져보면 하나님께서 '나' 보다 나를 더 잘 아시며 또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 보다 더욱 나를 사랑하시기에
당장의 내 입장에서는 이해 되지 않더라도 궁극적으로는 내게 있어 가장 귀한 것을 주시고자 하심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깊은 비밀을 깨닫는다면 내가 비록 못 났고 어리석어 부족해보여도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귀한 자임을 시인하게 될 것이며,
또 당장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상황을 하나님께서 겪게 하신다해도 '하나님의 뜻'을 믿고 묵묵히 충성하며 가다보면 결국 하나님의 즐거움에 참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결국 '나'와 '나의 뜻' 보다 '하나님'과 또 '하나님의 뜻'이 훨씬 귀하고 중한 것이며,
이 점에서 '종교'는 인간이 만든 것에 지나지 않으나 '섭리'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위대한 역사가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