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Cents Column by Director Bong of RGO 24! 'Although I am lacking and my writing is only worth as much as 'three cents...' I share the Sunday messages and interpret them with 'the language of the world.''
저는 여전히 무교회주의자입니다.
현재 몸담은 선교회, 이전의 교회들을 다녔을 때부터, 청소년기 나름의 ‘교회관’을 정립하던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습니다.
출퇴근 시간을 정하지 않는 회사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회사’라는 ‘조직’이 운영(경영) 되려면 규정이 있어야 합니다.
규정이 있다는 말은 규정을 잘 지키는 사람과 그렇지 못 한 사람으로 ‘나뉘어’ 진다는 것입니다. 곧 이어 이 ‘나뉘어진다’는 말은 이들을 대하는 태도가 각각 다를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출근 시간을 잘 지키는 부류는 성실한 사람들로 나뉘어(분류 되어) 그에 맞는 차별화 된 혜택을 받곤 합니다.
‘조직’의 경영이 잘 되려면 이 같은 ‘규정’들이 점점 많아지고 정교 해 져야합니다.
회사 경영의 가장 기본적 규정인 이 '출퇴근 시간' 규정을 없앤다는 말은 ‘무회사주의’와 다를 바 없습니다.
지금은 ‘출퇴근 자율제’ 등으로 유사한 제도가 생겨나서 이제 엉뚱한 제 발상이 황당무계한 것만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의 이 발상은 사실 성경에 그 근거가 있습니다.
아침 일찍 ‘출근’해서 열심히 일한 사람과 남들 ‘퇴근’할 때쯤 ‘출근’하여 1시간 남짓 일한 사람에게 똑같은 일당을 지급한 포도원 주인의 비유가 그것입니다.
인간의 생각(경영자의 입장)으로는 열심히 일을 많이 한 사람과 그렇지 못 한 사람을 분명하게 ‘나누어’, 서로 다른 ‘차별’을 두는 것이 합리적이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 생각은 우리의 일한 정도가 아니라 우리가 필요한 것을 은혜로 주시는 입장에서 ‘나눔’과 ‘차별’은 사실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마 20:13~15)
가장 좋아하는 영화라 손꼽는 ‘사운드 오브 뮤직’(1969 미국)에는 한 ‘가정’을 바라보는 두 시각이 대조되어 제시됩니다. ‘규정’으로 가정을 ‘경영’하려는 아버지(폰트랩 대령)와 모든 규정을 허물어 버리려 애쓰는 마리아.
‘집’과 ‘교회’는 이 ‘규정’이 없을수록 좋은 곳이라 생각합니다.
가능한 최대로 편하고 재미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누군가 교회든 집이든 그 안에서 ‘규정’을 늘리려고 한다면 이는 ‘경영’을 하려는 사람일 확률이 높습니다.
‘규정’이 있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지키는 자’와 ‘못(혹은 안)지키는’ 자로 나뉠 수 밖에 없고 그에 따른 ‘차별’이 수반 됩니다.
더 웃긴 것은 이 규정을 잘 준수하는 사람들이 이를 ‘권력’으로 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 열심히 일한 사람이 똑같은 일당을 지급한 주인에 불평의 목소리를 높이듯 말입니다.
이 ‘권력’은 ‘주인’을 향해서 목소리를 높이게 하고 동시에 그 반대편의 규정을 잘 못 지키는 자들에게 암묵적 압박을 가하여 마침내 죄의식을 느끼게 합니다.
사실 ‘규정’이 ‘죄’를 만드는 꼴이 됩니다.
이 '권력자'들을 향해 하나님은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결국 악하게 보신다는 말씀을 에둘러 하셨습니다.
이런 상황들을 보면서 필자는 오직 주의 말씀(A,I로라도)이 전해지는 가상 교회(인터넷 교회 혹은 무교회)가 선교회에도 생긴다면 저는 그 교회의 1호 등록 신도가 될 것이라 오래 전부터 생각을 해 왔던 것입니다.
물론 ‘교회’ 역시 엄연한 ‘조직’이니 ‘경영’적 요소는 필수불가결입니다.
하지만 규정을 늘려나가는 것에는 더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규정’을 통해 ‘나눔과 차별, 권력과 죄의식' 등 엉뚱한 부작용이 없나 더욱 경계해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주께서는)은 우리를 ‘경영’하지 않으시고 ‘사랑’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경영’을 하려한다면 당연히 99마리 양에 집중해야 합니다.
‘사랑’ 하시니 길 잃은 양 한 마리에 집중하시는 것입니다.
‘경영’을 하려면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당근과 채찍’으로 99마리 쪽으로 오게 해야 하지만
‘사랑’하면 99마리를 그대로 내 버려두고 한 마리 양을 찾아 길을 떠납니다.
하나님은 무식하고 게으른 종을 대하실 대도 규정을 단 10(십계명)개만 주셨습니다.
아들의 때에는 무려 80%를 줄여 주셔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단 2가지 규정만 남겨 주셨습니다.
시대가 더 진화된다면 이 규정의 숫자는 더 줄어들어야 하는 것이 마땅해 보입니다.
‘오직 하나님, 하나님만 사랑’하는 단 하나의 규정만 존재하는 시대.
그래서 신부(新婦)의 시대입니다.
“내게 배우라”는 동일 주제의 말씀이 벌써 몇 주 째 계속되고 있습니다.
“내용을 다시 봐도 이미 분명히 배워 아는 내용인데.... 왜 거듭하실까?“
어리석은 제 의문에 선교회 수련원 원장께서 명쾌한 답을 주셨습니다.
“그에게서 배우지 않은 것들, 다른 사람들에게 배운 것들을 아직 다 빼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눔’과 ‘차별’이 없고 ‘권력’도 ‘죄의식’도 없는 상태를 ‘화목, 하나 됨’으로 보시는 것은 아닐까...
나의 집, 그리고 우리의 교회....
과연 오직 주께 배운 것들로만 가득 차 있나 다시 살펴볼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