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Cents Column by Director Bong of RGO 24! 'Although I am lacking and my writing is only worth as much as 'three cents...' I share the Sunday messages and interpret them with 'the language of the world.''
교회는 그리스로 가 '철학'이 되고, 로마로 옮겨서 '제도'가 되었다.
유럽으로 가서는 '문화'가 되었고 미국으로 왔을 때 '기업'이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한국에 와서 '대기업'이 되었다)
한국의 대형교회 문제에 대해 아프게 꼬집는 말입니다.
실제로 한국 교회는 세계적인 대형교회들이 많이 생기고 난 뒤 퇴락의 일로로 접어 든 것 같습니다.
교회가 커 졌다는 것은 사실 하늘의 축복입니다.
하지만 큰 축복은 감당해야 할 큰 의무가 수반 되는 일이며, 감당하지 못 하면 '축복'은 오히려 '재앙'이 될 수도 있는 그런 것인가 봅니다.
'대형교회가 된다는 것'의 가장 큰 우려는 교회가
1차집단(Primary Group, 구성원 간 대면적 접촉과 친밀감을 바탕으로 결합되어 구성원들이 전인격적인 관계를 이루는 집단)에서
2차집단(Secondary, 특정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적인 만남, 인위적으로 결합되고, 구성원 간 제한 된 관계 형성)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입니다.
'가족'의 관계로 지내다가 '회사의 동료'쯤 되는 그런 관계로 바뀐다는 말입니다.
이 경우 표면적으로 직접 드러나는 문제 중 하나가 바로 '소통'의 문제입니다.
서로 눈 빛 만 봐도 통하던 사람들간 소통에서 이제 얼굴도 잘 알지 못 하는 많은 사람들간의 소통이라...
자연스럽게 일방적 공지 형식(One way communication)의 소통이 늘어 나기 쉽고, 이에 대해 대부분 '침묵'의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
'소통'이 안 된다는 문제 제기가 위에서도 아래에서도 동시에 나오기 시작합니다.
'일방적 공지'는 서로 다른 '동기(Motivator)'를 가진 사람들에 대해 효과적인 동기부여를 일으키기 어렵습니다.
그러기에 '공지'에 대해서 개개인들은 곧잘 '침묵'하기 쉬운 법입니다.
또, '침묵'은 어떤 사람은 '동의'를 나타낸 것이고 어떤 사람은 '반대'를, 또 어떤 사람은 무관심, 공지 내용에 대한 이해 부족등 너무나 다양하게 해석 될 수 있는 표현방식입니다.
사유야 어떠하든 침묵하게 되는 본질적 이유는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내가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내 생각을 편하게 드러내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것이 교회가 2차 집단이 되어 가는 징후입니다.
2차 집단은 특정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적인 만남으로, 구성원 간 제한 된 소통만 필요로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각 개개인과 대면적 접촉, 깊은 이해를 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해결책은 모두가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이라 말하고 싶을 것 같습니다.
모든 교회는 오직 한 분의 주를 모시고 사랑합니다. 하지만 각 개개인이 생각하고 사랑하는 주는 또 전부 다릅니다.
단 한 분의 주와 만 명을 위한 만 명의 주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다면 '하나 되기'는 새로운 '강압, 폭력'이 될지 모릅니다.
공자는 “군자(君子)는 화이부동(和而不同)하고, 소인은 동이불화(同而不和)한다”고 했습니다.
'하나 됨'을 '같게 만드는 것(同)'으로 보기 쉽겠지만 이 '같아 지게' 하려는 노력은 태생적으로 '다툼'(不和)을 유발합니다.
모두 '똑 같이 빨간 옷을 입고 오라'고 했다합시다. 모아 놓고 보면 어떤 이는 주황에 가까운 빨간 옷을, 어떤 이는 너무 새 빨간, 혹은 분홍에 가까운 옷... 등
'왜 똑 같은 옷을 입고 오지 않았나' 다툼이 일어납니다. 각자 갖고 있는 빨간 옷이 모두 달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두 다른 색의 옷을 입고 모인다면 '너는 파랑 색을 입었구나, 너는 노란 옷을...' 서로 다르기에 상대방의 색에 대해 따질 일이 없을 것(和而不同)입니다.
'대형교회의 저주'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는 더 많은 소통의 장이 마련 되어져서(온라인, 오프라인) 1차 집단의 강점을 지속적으로 유지 해 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가 제대로 성장하려면 물리적 면적의 확장 뿐 아니라 더 다양한 생각과 비판에 대해 수용의 범위(사랑과 용서와 관용)가 넓어져야 되는 것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주와 함께 모으고 헤치는 교회, 주와 하나 된 교회는 '동(同)'하려는 교회가 아니라 '화(和)'하고자 하는 교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