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잼 칼럼 by 갓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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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받는 데 환난이 필수인가?

jms 316 영휴거의날 행사



3.16 10주년 예배와 기념행사는 몸은 좀 추웠지만 머리는 뜨겁고 가슴은 벅찼습니다. 솔직히 며칠 전부터 날씨가 우려되긴 했었습니다. 악평자들이 또 날씨 갖고 이러니저러니 씹어댈 것 같아서 특히 그랬습니다. 다만 날씨 예보 상 매일 매일 비가 내리는 시간이 앞당겨지는 것을 보면서 행사에 큰 영향 없이 비는 그칠 것이라는 확신은 생겼습니다. 물론 그렇게 확신했음에도 우산과 우의를 챙긴 현실은 어쩔 수 없었지만 말입니다.



행사 내내 비, 싸라기눈, 바람이 오다가다 변화무쌍한 날씨를 통해 하나님께서 섭리 역사를 함축적으로 보여주신 것이라 느껴졌습니다. 결국은 성공이며 승리임을 파란 하늘로 보여주셔서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모두들 그리 느꼈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3.16 행사 2~3주 전부터 주인공이신 선생님이 안 계신 것이 너무 상심되었고, 그런 상실감을 가중시키려는 듯 유독 ‘환난’에 대한 말씀이 많은 것 같아 좀 우울하기까지 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새벽 잠언 하나를 두고 근본적인 자문(自問)을 하며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또한 수요 말씀에 환난이 언급된 잠언을 접하면서 ‘환난 당함’의 깊은 뜻을 내가 제대로 아는 것인지 점검하고 싶었습니다.



(사실 이 글은 이미 답을 얻고서 그 ‘과정’을 나누고자 적은 글입니다. 끝까지 읽으면 너무 당연한 말을 이리 길게 하냐고 재미없는 영화에 평점 0점을 주듯 하실 수도 있으나 그 ‘과정’, 즉 ‘환난’이 너무 중요하다는 답을 얻었으니까요.)


“우리가 축복을 받는 데도 고난과 어려움이 있고, 수고도 해야 한다. 그 모든 것이 과정들이다. 이것을 이기고 행해야 끝에 가서 얻는다. 땅에 묻힌 보화를 파내는 수고는 있는 것이다.”

- 2025. 3. 5. 수요일 새벽잠언 중


“아는 것이 복이다. 알아도 하나님 뜻대로 살며 말없이 가니 ‘왜 환난 당하지?’ 말들 한다.”

- 2025. 3. 5. 수요 말씀 중


많이 들어온 유사한 내용의 잠언이었지만 궁금한 것들이 떠올랐습니다. ‘과정’이라 함은 ‘끝’이 있음을 말하는 것인데 그 끝을 어떻게 규정해야 하지? 구원과 축복의 기준은 무엇일까? 알아도 말씀에서처럼 ‘하나님 뜻대로 살며 말없이 가니’ 사람들이 “왜 환난 당하지?”라고 묻는 것에 난 답을 안다고 확신하고 있는 건가?


물론 선생님의 상황 자체가 우리에게는 환난인 것은 맞지만 그렇게 뭉뚱그린 전체 차원의 환난은 개인의 문제 해결의 답으론 좀 미흡하고, 한편 신앙 좋은 우리 회원들은 이런 고민을 하는 나에게 “말씀 배웠으니 잘 알잖아?”라고 쉽게 말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물론 나도 배운 말씀을 바탕으로는 말할 수 있지만 정말로 마음 깊이 ‘진심으로 환난을 이해하고, 감수하고, 극복하고 있는 것인가?’가 궁금했습니다. 이게 명확해진다면 누구에게든 ‘환난’을 설명할 수 있는 좋은 소재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생겼습니다.


‘환난’에 대한 말씀은 잘 보면 요즘뿐 아니라 기독교복음선교회에서 환난이란 단어는 끊임이 없었고, 그렇게 따지면 요한계시록 2장에는 장차 받을 고난까지 예언되어 있으니 신약 2천 년간, 그리고 그 이전 성경의 역사를 보더라도 창세로부터 하나님의 역사 기간 내내 환난의 사건들은 가득합니다.


회원들도 많이 공감하겠지만, 내 개인적으로도 섭리사에 몸담고 있으면서 사실 환난은 아예 내 삶에 달고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랄까? 고난, 어려움, 고통, 수고... 즉 환난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고, 내가 구원과 축복을 받기 위한 과정임을 부인해 본 적은 없었습니다.


물론 나야 구원과 축복의 확신이 있기 때문에 “그래, 나는 구원과 축복을 받는 것인데 환난쯤은 아무것도 아냐!”라고 말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사람들이 어떤 사상이나 신앙에 확신에 찬 나의 모습 자체는 인정할지언정 ‘구원이나 축복의 전제가 환난’이라고 한다면 그건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 것 같긴 합니다. 정작 진리이면서도 사람들은 받아들이기를 주저하니 전도가 어려운 것일 테고, 그래서 ‘성경의 역사는 환난의 역사’라는 답으로 되돌아오며 믿는 자들의 마지막 강력한 ‘단무지’ 카드인 ‘절대 믿음’이 강조되는 것일 겁니다.


세상 참 좋아졌습니다. ChatGPT에게도 물어봤습니다. 최대한 질문을 다양하고 정교하게 구상하여 여러 차례 물었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답도 그다지 만족스럽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신학적 설명과 성경적 근거를 들어 논리적으로 답해준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답의 핵심은 “구원과 축복에 환난이 필수적인 것은 아니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으로 인해 종종 환난과 박해는 있을 수 있다. 이를 통해 더 큰 것을 주시니 신자는 믿음의 여정 속에서 만날 수 있는 환난을 극복할 의무가 있다.”는 거여서 내게는 결국 “믿음으로 극복하고 나아가라.”는 해석으로밖에 안 들렸습니다. 이미 받아들이려는 의지가 있는 자들에게는 이건 해답이 될 수 없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기독교 신학은 환난 극복을 ‘신도(信徒)의 의무(義務)’로 못 박는 느낌이어서 이건 ‘절대 믿음’과 별반 다르지 않은 강요일 뿐 해답으로서는 명쾌하지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전도를 할 때라도 이런 정도로는 상대의 욕구를 파악하지도, 또 채워주지도 못할 것이기에 적어도 섭리는 이런 두루뭉술한 정의(定義)는 넘어서야 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결국 답은 내 노력이 아니라 선생님의 말씀에서 받았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인데 돌고 돌아왔습니다. 깊이 생각하느라 고생하긴 했습니다만, 성령님이 지혜롭지 못한 저를 보시기 안쓰러우셨나 봅니다.


3월 14일 성령 사연 46에서 환난이란 단어를 쓰신 것도 아니고 그 상관관계를 말씀하신 것도 아니었지만 <환난은 성공>임이 내게는 너무나 확연히 설명되었습니다.


<화복 전환>

사람이 아무리 고생하고 억울함을 받아도

사람들에게 갖은 비방, 무시, 버림과 배신을 당하여도

하나님 안 버려서 결국 잘되고 성공하면

과거에 당한 것들이 성공을 위해 온 길이 된다.

그런 역경 계단을 올랐기에 성공했으니

과거 처음부터 모두 실패 길이 아닌 성공 길을 걸어온 것이다.

역경 아니었으면 성공이란 이상 세계에 못 왔다.

과거의 고통들이 성공을 기념하는 것들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3월 5일의 잠언을 보니, 선생님은 인생 문제[=동기]를 해결하는 수고인 환난[=과정]을 거치면 당연히 구원과 축복[=목적]이 해결되는 순서를 너무나 순리적으로 말씀해 주신 것인데, 그래서 3.16 행사가 궂은 날씨라는 어려운 ‘과정’, 즉 ‘환난’ 끝에 구원과 축복이란 성공의 파란 하늘을 보여주신 것인데, 나는 무의식적으로 구원과 축복이라는 목적에 치중한 기복적(祈福的) 관점에서만 환난을 바라보니 착오를 일으켰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역시 ‘생각이 신(神)’입니다.


정리하고 보니 너무 쉬운 문제를 어렵게 풀려고 했습니다. 그걸 또 성령님은 아시고 더 열심히 노력하여 깨달으라고 타이밍에 맞춰 말씀해 주셨습니다.



설교 시간에 말씀 핵 한마디만 잠언같이 알고, 그에 대한 설명이 끝나면 내용을 알았으니 잘한 것 같아도 그것이 아니다.

한마디의 말은 정이나 망치와 같다.

정으로, 망치로 돌을 깨 없애듯이 해석한 말씀들로 뇌와 마음속에 있는 모순과 죄들을 깨 부셔내야 한다.

그래서 긴 설교를 해 준다.

설교 시간이 말씀의 정으로, 망치로 쪼아 개인 작품을 만들어 주는 시간이다.

고로 그 시간에 열심히 만들어야 한다... (후략)

- 2025. 3. 18. 성령 사연 48 중


이 글의 제목도 “구원을 받는 데 환난이 필수인가?”가 아니라 “환난을 이겨내니 구원을 받는다” 정도가 됨이 타당할 것 같습니다. 근데 아마도 “환난 이기면 구원 받고 축복 받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할까 봐 거꾸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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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받아들이는 인생 문제의 해결 과정, 즉 환난은 그 형태, 시기, 강도, 수준, 느낌, 그리고 받아들이는 태도 등 다양하겠지만 각자에게 다가오는 그 다양한 환난은 더 나은 결과를 얻기 위한 나의 ‘자발적인 선택’일 것입니다.


어쩌면 너무 쉬운 문제를 어렵게 풀려고 한 ‘환난’을 통해 그래도 나는 값진 보람과 답을 얻어 기쁩니다. 오늘 저의 답은, 내가 ‘선택한’ 환난은 그냥 막연히 고단한 환난이 아니라 그 자체로 ‘구원’이며 ‘축복’이라는 거네요.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다시 선생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왜 의인이 맨날 고통을 당하고 악인들은 뻔뻔해야 하는지? 또 하나님, 성령님, 성자께 간절히 기도하게 됩니다.


[by 트리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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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3/19/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