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Cents Column by Director Bong

Three Cents Column by Director Bong of RGO 24! 'Although I am lacking and my writing is only worth as much as 'three cents...' I share the Sunday messages and interpret them with 'the language of the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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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架上)의 고독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윤동주 시인이 쓴 ‘십자가’라는 시 입니다.

시인은 십자가 위에 달린 예수의 육은 ‘괴로웠'을 것이나, 그 영은 ‘행복’했을거라 봤습니다. 하지만 시의 말미에 너무 선연(鮮然)한 ‘외로움’ 을 짙게 그려 내고 있습니다.
정말 가상(架上) 예수는 너무나도 ‘외로웠’을 것 같습니다



빌라도 법정에서 일어난 일


예수의 십자가 형이 공식적으로 확정 된 곳은 빌라도의 법정 입니다.
모두 알다시피 빌라도는 아무리 찾으려 해도 예수의 ‘죄’ 찾을 수 없어 무죄를 확정하고 싶었으나, 법정 안을 가득 채운 무리들이 ‘십자가 처형'을 강력하게 요구하며, 반란까지 일으킬 듯한 기세를 보였기에 피 값을 당신들이 치루라 결국 예수를 내어 주고 맙니다.

예수께서 활동 하던 당시의 ‘성전’은 정치, 경제, 종교 모든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기원전 20년부터 시작 된 예루살렘 성전 공사는 헤롯 임금이 유대인들의 환심을 얻기 위해 시작한 것으로 다분히 정치적 목적에 의한 건립이었습니다


서기 64성전이 완공 되었을 때 (당시 예루살렘의 총 인구를 3~5만명으로 추정하는데) 무려 18천명이 실직을 했다고 하니 ‘성전’이 갖는 경제적 의미 역시 엄청났던 것입니다

성전건축 외에도 다양한 성전 관련 비즈니스(?)’들을 생각 해 본 다면 성전은 그 자체로 최고의 (정치적, 종교적)상징성을 갖고 있었던 것 외에 이권 사업의 핵심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오직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하는 모든 곳이 ‘성전’임"을 밝히셨고,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성전에서 돈을 벌어 들이던 환전상과 제물 파는 자들을 내 쫓으셨습니다.


심지어 ‘성전을 허물면 내가 3일만에 다시 세우겠다’ 고까지 하셨으니 당시 성전을 둘러 싸고 모여있던 '기득권자'들은 '예수를 어떻게 하면 없앨까' 고민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빌라도 법정에는 바로 이런 예수께 불만을 품고 있던 무리들(혹은 기득권자들에 의해 매수 된 자들)이 모여, 결국 ‘예수가 로마에 반역하는 사람’이라는 '명목'으로, 하지만 '실상'은 종교 재판, ‘여론 몰이 재판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매 달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 주라’던 예수께서 로마에 반역을 꾀했을 리가 없다는 것을 뻔히 알고서도 말입니다.



외로웠던 예수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피를 흘리는’ 십자가 위 예수의 ‘외로움’은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에서부터 시작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와 함께 잠시도 깨어 기도할 수 없었던 제자들

그리고 그 ‘외로움’은 고스란히 빌라도의 법정에까지 이어 졌을 것입니다.
예수로 인해 소경에서 눈을 뜬 자, 문둥병에서, 중풍에서...

각종 육신과 영혼의 병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 받고 되 살아났던 그 많은 사람들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윽박지르는 군중들 속에 혹 예수는 자신을 통해 표적을 보고 삶이 바뀌었던 자가 오지 않았나 찾지 않았을까요?
'그는 죄가 없다.오히려 그가 일으킨 표적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온 사람들이 여기 있다.’ 증거 해 줄 사람을 기다리시지는 않았을까요?

표적을 보고, 체험 했던 그 들은 도대체 어디 가 있었을까요?
두려움에 베드로 처럼 멀리 도망쳐 있었던 것일까요

아니면 법정에 와 있었더라도 성난 군중들 속에 한 마디 말도 못 꺼내고 부끄럽게 얼굴을 가리고 있었던 것일까요


사형 언도의 공포보다 겟세마네의, 빌라도 법정에서의 ‘외로움’이 예수께는 더 견디기 힘든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증거해야 할 사람들


정명석 목사께서 금주 말씀을 통해 신앙인들이 자기에게 보이신 하늘의 표적을 자기가 증거 않으면 묻혀 버린다 가르쳐 주셨습니다

표적이 표적을 낳기에, 표적을 증거해야 또 표적이 일어난다고도 알려 주셨습니다.

(표적을 본) 그 많은 사람들 어디로 가고 나만 홀로 서 있느냐

그 누가 증거 해 줄 자 있는가 하고 사방을 둘러 보네...


하늘의 위대한 표적을 경험한 사람들이라면 함께 '기도하고 증거함'으로 예수의 '가상(架上고독'을 덜어 줄 수 있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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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7/17/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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