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Cents Column by Director Bong

Three Cents Column by Director Bong of RGO 24! 'Although I am lacking and my writing is only worth as much as 'three cents...' I share the Sunday messages and interpret them with 'the language of the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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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푼수필)선생(先生)이 있어 다행이다

삶을 살아감에 있어 내게 '선생(先生)'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닥친 ’생(生)‘이 너무나 막막하여 다음 발걸음은 어디 둬야 할지 답답할 때,

도무지 알 수 없는 그 ’끝(死)‘이 두려움으로 엄습할 때...

단어 그대로 먼저(先) 살아내시어(生) 그것을 보여 주시는 분이 계신다는 것은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같은 닭띠로 꼭 24년 필자보다 먼저(先) 나신(生) 정명석 목사님을 필자가 10대부터 선생으로 모셔 왔으니 목사님은 제게 말 그대로 완벽한 ’선생(先生)‘이십니다.


먼저 선생께서는 종교지도자로서 ’오직 하나님 사랑‘을 전해 주셨습니다.

당신의 삶에서 70여 차례 꼭 죽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구해 주신 삼위의 은혜를 간증함으로 ’하나님과 나는 일대일‘의 절대적 사랑의 관계임을 모두에게 와 닿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는 ’나‘ 하나를 지키시고 도우심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나‘ 이전의 무수한 ’나‘들(선조,先祖)을 지켜주시고 함께 해 주셨다는 사실을 또 알게 하셨습니다.


실제로 ’나‘의 부모께서 안 계셨더라면.

부모님들의 부모님들... 또 그 부모님들....

그 어떤 인연, 단 한 명의 ’나‘에게라도 불행한 일이 발생했었더라면 적어도 오늘날 ’나‘는 세상에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따져 올라가면 궁극에 가서 ’나‘의 부모님들을 아니 무수한 ’나‘들, 모든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 앞에 당장 직접 내가 가서 서 있게 됨을 보게 됩니다.


목사님(선생)께서는 ’나'의 '존재론‘과 '우리'의 ’연기론(緣起論)‘을 관통하며 창조주, 전지전능하신 절대신 ’삼위‘와 ’나‘ 사이의 어마어마한 시공간의 간격을 미간(眉間)만큼 가깝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이 땅에 내가 온 것만으로도 이미 가장 큰 축복임을 일깨우신 선생께서 더 하여 주신 ’인생(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무수한 가르침들.

역시 굳이 단 한 마디로 망라하자면….

’인생은 삼위의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을 깨닫고 알아 육 평생, 영 영원히 사랑의 대상으로 살아야 한다. ‘가 될 수 있을 텐데….


평범해 보일 수 있는 문장이지만 사실은 인생들의 최대 난제(難堤) ’인생은 어디서 왔고? 어떻게 살다가? 어디로 가는가?‘를 모두 밝히 드러내는 가장 위대한 나침반입니다.


그의 가르침은 단상의 말씀들을 통해서만이 아닙니다.

고희(古稀)를 훌쩍 넘기신 지금까지 수 없는 '나'들, 온 인류를 위한 기도를 위해 매일매일 정한 시간에 소년의 미소로 밝게 웃으며 기쁘게 교회로 뛰어가는….


’오직 성삼위를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해 사랑하라‘

’하나님과 나는 일대일이라.‘

’생명을 사랑하라‘

’인생은 멋있게 사는 거야‘

’시계처럼 살아라‘

’주의 돛을 달고 주와 함께 끝까지‘

’만사에 기쁘게 감사함으로 뛰어라‘ ....


행한 것을 말씀하시고 말씀 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시는...

'말씀'과 '행함'이 전혀 다르지 않은 삶을 여과 없이 다 보여 주시는 선생님.


말씀과 실제의 실천하시는 모습을 통해 필자는 인생의 대소사에서 크게, 때로는 정밀하게 스스로의 삶을 조절(Tuning)해 왔습니다.

가장 큰 기쁨의 때에도, 지독한 슬픔의 기간에도 함께 해 주셨고, 최고로 막막하던 때, 제일 혼란스러울 때 위대한 깨달음과 가장 깊은 지혜를 얻도록 도우셨습니다.


어느덧 필자 역시 누군가 보다 먼저 난(先生) 입장이 되어보니 ’선생‘이라 불리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새삼 느끼게 됩니다.

관련하여 여전히 안타까운 것이 있다면 훌륭한 선생의 궤적을 따라왔으면서 그 가르침에 만의 일이라도 부응할 만한 것을 이뤄 놓은 것은 없구나... 하는 아쉬움.


성경에서 선생이라 불리는 것을 즐거이 받지 말라 했지만 사실 선생이라 불리는 것에 대한 부담은 참으로 무겁고도 무거운 일인 것입니다.

필자에게 있어 ’후생가외(後生可畏)‘는 ’넌 먼저 나서(先生) 후생(後生)들에게 뭘 보여 주느냐?‘ 질문을 받는 일이 될 것입니다.



다시 돌이켜 보건대 여전히 ’선생‘이라는 호칭의 크고 무거운 부담을 감내(堪耐)하고 계신 '선생'이 계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3.16을 맞아 주재형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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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3/1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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