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Cents Column by Director Bong of RGO 24! 'Although I am lacking and my writing is only worth as much as 'three cents...' I share the Sunday messages and interpret them with 'the language of the world.''
필자의 장모께서는 어린 시절 천주교 소학교를 다니셨습니다.
유교의 종가 며느리로 시집오면서부터 당신의 종교에 대해 일절 내색 드러내지 않고 지내셨다가 남편(필자의 장인)별세 후 조용히 홀로 다시 천주교회를 찾으셨다고 합니다.
임종을 준비하기 위한 입원 후 필자의 처형 중 한 분이 장모님 댁 정리 중 당신의 가방 속에 깊숙히 보관된 묵주를 발견하고는 들고 가 의식 없이 병상에 누우신 장모님 손목에 걸어 드렸더니 미동조차 못 하시던 장모님 눈에 눈물이 맺혔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래 지 않아 너무나도 평안히 영면에 드신 것입니다.
장례 일정 중에 이 얘기를 듣고 대대로 제사 형식의 장례만 지내던 유가족들 간 협의가 이뤄져 굳이 수소문하여 장모님 출석 성당을 찾고 그 교우들을 모셔 위령 '예배'를 드리면서,장모님 세례명이 아버지의 강제로 이교도 집안으로 시집을 갔으나 끝까지 정절의 신앙을 지켜 성녀가 된 '세실리아'(St. Cecile)였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혼'으로라도 다시 뵙고 싶었던 필자의 꿈에 빛 나는 옥색 한복을 갖춰 입고 필자가 생전에 뵈었던 그 어떤 때 보다 젊고 아름답게 광채 나는 얼굴로 나타나시어 ‘좋은 곳 가게 되었다’ 시며 의기양양 하시는 모습을 뵙게 된 것은 영면하신 다음 날 새벽이었습니다.
실제 장모님께서 성녀 세실리아에 비견할 정도의 신앙을 유지하셨던건지, 묵주를 손목에 걸어 드렸을 때 맺혔던 ‘눈물’의 실체가 무엇이었는지 확인 할 수 없고 이런 사연 이야기를 전하는 화자 스스로 지인의 마지막을 미화하고자 아전인수격 편향에 빠지기 쉽기에 이를 기반으로 ‘특정 종교의 구원에 관한 교리나 논리’를 강조하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입니다.
그저 뭐라 딱히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가슴 먹먹하게 전해져 오는 사랑, 그 이야기를 나누고자 할 따름입니다.
장례 기간 중 한때 이 복음의 역사를 함께 했었다가 지금은 ‘잠시’ 떠나 있는 또 필자의 부부가 좋아했던 한 '선배 부부'가 조문을 왔습니다.
이런저런 대화가 오가던 중 마침 조문을 와 있던 선교회의 다른 회원으로부터 '선배도 이제 다시 이 복음의 역사로 돌아오라'는 권유가 이어졌습니다.
‘자신 있다면 선교회가 전하는 말씀의 논리로써 다시 나를 설득해봐라. 내가 설득되면 다시 오마’
그간 이런저런 연구를 많이 했었노라 자신만만해 하는 선배를 두고 더욱 단순 명쾌하게 정리 된 핵심 교리를 소개하며 논쟁을 시작해야 할까요?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항‘상(常)’ 존재 하고 있는 최‘상(上)’의...
이른 바 ‘상도’는 말로 표현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창조 목적’이었기에 태초부터 존재 했던, 최상의 도(道)로서 우리 복음의 역사에서 가장 강조하고 있는 ‘상도’는 바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야말로 '말로 표현(논리)' 되는 순간 더 이상 ‘상도’ 이기 어렵습니다.
배우자든 누구든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그 ‘사랑’을 '논리'로 풀 수 있을까요?
나의 아내가 세상에서 가장 예뻐서 사랑한다.
남편을 사랑하는 것은 그의 성격이 좋아서이다.
이렇게 ‘사랑’이 ‘논리’로 접근 되는 순간, 더 예쁘고, 성격이 더 좋아 보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의 ‘사랑’ 자체가 모순에 빠집니다.
선교회가 전하는 말씀의 논리로써 설득해보라던 선배에게 묻고 싶습니다.
(우리 말씀의 논리가 약해서가 아니라)교리와 논리를 떠나 정말 선배님은 태어나서 성장하고 복음의 연으로 배우자를 만나 자녀들을 낳고 기르면서
살아온 날 수 만큼 무수하게 지켜 주시고, 사랑해 주셨던 그 큰 사랑의 사연들을 모두 잊으셨는지 아니면 기억나는데 애써 부정 하실건지...
그런 삼위, 주의 사랑이 없었다고 제게 말한다면 저는 단언컨대 그 사랑이 너무 컸으며 동시에 나의 지극히 평범한 일상 속으로까지 너무나 가까이 와 닿아 있었기에 모르고 있는 것 뿐이라고 답할 것입니다. 우주가 너무 크기에 한 눈에 볼 수 없고 눈썹은 내 눈과 너무 가까이 있기에 볼 수 없듯 말입니다.
정명석 목사께서는 ‘선지자’는 잘 믿어져도 ‘메시아’ 믿기는 어렵고, 더 크신 ‘하나님’, 하나님의 ‘사랑’은 더 알고 믿기가 어려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더구나 그 큰 사랑이 너무나도 직접적으로 내 옆(꿈 같은 현실)에 와 있기에 오히려 사람들은 그 사랑을 실감하거나 인정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신약시대 유대인들이 수 천년 전 아브라함은 오히려 더 잘 믿었어도 우리 마을 뒷산 그 산상에서 수훈하는 이웃 집 아들래미 '예수'를 인정하기가 어려웠듯 말입니다.
이러한 연유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인식’하고 ‘반응’만 해도 사망권에서 생명권으로 그 운명이 바뀐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방 속에 들어 있던 묵주가 장모님 손목에 둘리던 '사랑의 꼭지점' 같은 그 위대한 순간과 같이 선배 부부의 마음에도 ‘논리’ 속에 가려져 있던 하늘과의 ‘사랑’의 사연들이 다시 둘릴 수 있기를 눈물로 기도해 봅니다.